자비의 희년을 위한 단장주교의 사목서간

"교회와 이 세상을 위해 선포된 자비의 희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야 하겠습니다"

단장으로 부터
Opus Dei - 자비의 희년을 위한 단장주교의 사목서간

사랑하는 나의 영적 자녀들이여, 예수님께서 나를위하여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2코린 1, 3) 우리를 사랑하신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중략)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에페 2, 4-6)”

서문에서 바오로 성인의 말씀을 언급한 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려 하는 바에 대해 주위를 환기시키기위함입니다. 프란시스코 교황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회 50주년을 기념하며 선포하신 ‘자비의 희년’을 앞두고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 준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지하다시피자비의 희년은 올 해 12월 8일에 시작하여 2016년 11월 20일그리스도왕 대축일에 마칩니다.

교황께서 올해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마침오푸스데이 안에서 선포했던 성모님의 해가 끝나가는 시기와 맞물리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환희를 느꼈습니다. 이는 자비의 모후이시며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를 보살피시는 또 하나의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모님의 전구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피난처 삼을 수 있고, 하느님께선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해결해주려 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이해심, 형제애, 영적 삶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인류 가족과 그 역사를 더욱 인간답게만드는 데”[1]기여하고자합니다. 날마다 우리 모두 굳건한 희망을 안고 걸어 나아가도록 합시다.천국은 우리에게 평화를 가득 안겨주기 위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손수 지으신 우리 인간을 언제나 기다리신다고 쉼 없이 여러 매개를통해 알리고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교황께서 상기하셨듯이, 하느님의창조물인 우리 모두 자애로우신 주 아버지 하느님의 손길을 묵상하도록 합시다. [2]

교회와 온 세계에 있어 진정으로 은혜로운 시기인 이번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신 프란시스코 교황께 실천과기도를 통해 감사합시다. 주님의 자비로우심 안에서, 7성사, 그 중에서도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고 형제자매들을 위한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주님과 더욱 친밀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교황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우리는 큰 기쁨을 느낍니다. 성령께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되고,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운 얼굴을 비추시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Deus, cui próprium est miseréri semper etpárcere: súscipe deprecatiónem nostram.[3]오 하느님, 오직주님만이 언제나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매일 기원합니다. 오 자비로우심이란! 교회가 초대하는 바와 같이 위안이 되는 하느님의성스러운 자비에 대해 우리는 항상 깊이 고민해야 하겠으며, 자비는 모든 것을 축약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믿음을 가지고 자비를 묵상합시다. 이번 자비의특별 희년을 선포하면서, 교황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자비라는 말은 거룩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오시는 궁극적인 최고의 행위입니다. 자비는 인생길에서 만나는 형제자매를 진실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근본 법칙입니다. 자비는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 주는 길이 되어 우리가 죄인임에도영원히 사랑 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줍니다.”[4]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발표된 지 25년이란세월이 흘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하느님의 놀라우신사랑을 평안함 속에 자주 묵상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여러 경험과 현대인의 다양한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필요한 것이며, 수많은 인간들 마음의 호소, 고통과희망, 그들의 불안과 희망으로 보아 당연히 요구되는 것입니다.”[5]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러한 말씀은 비단 현재에까지 유효할뿐만 아니라, 매일 날이 지날수록 그 시사하는 바가 더욱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오늘날에 있어 이 간절함이야말로 되려 시급성을 시사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프란시스코 교황께서 교황령 내에 소재하고 있는 여러 대성전 성문(聖門)을 열어 젖힐 때, 그리고 각 주교들 역시 교구 내 성전의 성문을열 때, “그 때 우리는 교회의 삶과 모든 인간과 무한한 우주를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맡겨 드리며 미래의풍요로운 역사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자비를 아침 이슬처럼 내려주시기를 빌 것입니다.”[6]

3. 호세마리아 성인은 지상의 길을 주님께서 가져다 주신 자비로 가득 채울 것을 당부하면서, ‘영적인삶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헌신은 주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며 이는 비단 우리 자신만이 아닌, 온 인류를향한 것입니다.’[7]라고말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하느님의 손을 잡고, 그리스도교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물론 선의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 모두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성심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자비로운 사랑의 물결이 온 인류를 휘덮도록 주님의 사업에 동참합시다.

이러한 감정과 열망을 바탕으로 여러분에게 깊은 신심과 환희로 자비의 희년을 맞이하기를 당부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노래하는 경이로움으로 가득찬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힘을 얻을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주님의 삶과 가르침 안에 머물 것이며, 이를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가운데 호세마리아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호세마리아성인은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은 착한 목자에 언제나 시선이 향해 있었으며 (요한 10, 1-18 참조), 우리는 물론 수많은 형제자매들에게 천국과지상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볼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인류와 함께하는 하느님의 자비

4. 구약성경의 수많은 페이지를 통해 알 수 있듯, 창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는 이루 다 헤아릴수 없습니다.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신 분, 분노에더디시고 자애가 크신 분.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신 분 그 자비 당신의 모든 조물 위에 미치네.” (시편 145, 8-9) 그리고 선지자들은 쉼 없이 경고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요엘 2, 13)

최후의 만찬 시 예수님께서는 유대교 전통에 따라 ‘위대한할렐’이라고 알려진 장엄한 감사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이 기도에는하느님께서 창조와 인간 역사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이 나열되어 있고, 각 절이 끝날 때 마다 후렴으로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36편)가 반복됩니다.

“자비를 통하여 구약의 모든 사건이 심오한 구원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8]신약성경에서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인간으로 나신 당신의 아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고통 속에 희생하셨고, 성체성사를 비롯한 여러 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이야말로 최상의사랑 행위이며 하느님 자비의 근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십자가의 길에서 자신을 희생하심까지, 인류에게 보여주셨던 동정심과 이해심을 증거하는 복음 말씀을 자주 묵상합시다.우리 모두 수많은 자비의 증거 안에 견실하게 머무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셨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며, 굶주린 군중을 먹이시고 가르침이담긴 빵을 듬뿍 나누어 주셨으며, 회개한 죄인들과의 만남에 나아가 그들을 용서하시고, 제자들을 뽑으시고 바라보심과 말씀으로 그들을 꾸짖으셨으며, 사도들을불러모아 그들을 세계만방에 파견하셨고,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등 이 외에도 많은 증거를 통해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기적과 말씀을 행하실 때에는 항상 분명히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얼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는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걷는 길에 비친 빛과 그림자 속에서 주님의 자애로우심이 부재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교회에 머무르시는 성령을 통해, 성체성사에서의 그리스도 현현(顯現)을 통해, 그리고더욱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모님의 전구 기도를 통해 항상 자비의 물결은 이 세상 위에 격렬히 흘러 넘쳤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함이 멈추어선 안될 것입니다. 우리모두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다른 이들도 주님의 은혜로 흠뻑 젖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자비하신 주님의 역사

5. 성 요한 바오로 2세는회칙, ‘Dives in Misericordia’ <자비로우신 하느님>를공표하며 ‘자비로움’을 인류 역사와 교회 생의 중심에두었습니다. “종말론적 완성이 오면 자비는드디어 사랑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세속에서 인간의 역사는 죄와 죽음의 역사이기 때문에사랑이 자비로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고 자비로서 실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아계획, 자비의 계획은 당신 백성이 물려받는 계획이 되었고 교회의 계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자비로운 사랑의 계시가 절정을 이룬 곳이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9]

사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둘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부활의 신비는 모든 면에서 주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줍니다. 복자 바오로 6세는 “구원의모든 역사는 성스러운 자비로 인도되며, 이는 곧 인간의 자비로 나아간다”[10]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바치셨습니다.” (히브 9, 28)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와 똑같이유혹을 받으셨으나 죄는 짓지 않으신, 진정한 동정심을 보여줄 수 있었던 그 분의 자기 희생을 기꺼이받아들이셨습니다. (참고. 히브 4,15), 성모 송가를 통해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 1, 50)

6. 나의 자녀들이여, 우리들이바로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그 자손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초대 단장님은 개인적인 삶에서도, 오푸스데이의 삶에서도 주님의특별한 사랑을 끊임없이 발견했습니다. “모든 오푸스의 역사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자비의 역사”라고 여러 번 반복해 말씀하셨습니다. 1960년대에는 이를특히 강조합니다. “이 서간에서도, 당신들을 위해쓸 많은 다른 문건에서도, 주님의 지고하신 선함에 관한 일화는 고갈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오푸스의 길에 앞서 동행하십니다.”[11]이러한 맥락에서, 초대단장님은 “오푸스데이의 역사는 무릎을 꿇고 쓰여져야 한다”고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12]성 호세마리아는 그림 문장을 사용해, 오푸스의 창설과 발전을 주도하는이는 바로 주님임을 언제나 강조했습니다. 호세 마리아의 역할은 그저 성스러운 주님 뜻을 이루는 신실한도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성호세마리아와 오푸스데이의 생애는 긴밀하게 엮여 있습니다. 1928년 이래로 그 두 존재를 분리하는것은 불가능합니다. 묵상 중에 그는 “오푸스의 모든것은 주님께서 하셨다”고 외쳤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말하자면, 진정으로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쾌활한 마음, 예수님과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 그리고불가능에 맞서 인내하고자 하는 소망뿐입니다. 나는 어릴 적 병정놀이를 하며 장난감 군인을 움직였습니다. 원하는 대로 옮기고 때로는 목을 베기도 했습니다. 마치 그것처럼주님께서 나를 움직이십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행하셨습니다. 주님께서원하시는 길로 나를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이롭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치도록 허하셨습니다.”[13]

어떤 환경에서도 초대 단장님은 오직 주의 손에 그를 맡기고충실함을 정련하였습니다. 프란시스코 교황님이 기록한 바와 같이,“우리는 언제,어디에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몰라도 우리 삶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잘 압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우리의 모든 행동이 보람될 것이고,다른 사람을 향한 진정한 관심에서 비롯된 모든 행동 역시 가치가 있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하느님을향한 사랑의 행동은 어떤 것도 헛되지 않을 것이고, 너그러움을 베푸는 노력도 어느 것 하나 무의미하지않을 것이며, 고통스런 인내 역시 어떤 것도 그냥 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14]그래서 초대 단장님은 어떤 순간에도 화평을 잃지 않았습니다. “나의 자녀들이여, 통회할 때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일도, 어떤 슬픔도 나에게서 기쁨과 평화를 거두어갈수 없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nulloenim modo sunt onerósi labóres amántium 사랑할 줄 아는 자에게 수고로움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San Agustín, De bono viduitátis, 21, 26)그래서 사랑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in eo quod amátur, aut non laborátur, aut et laboramátur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행복입니다. (위와같음) 그 행복은 나를 어린 아이처럼 대하시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주님의 위대한 자비입니다. 내가 막 청소년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에 타오르는사랑의 씨앗을 던져 주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그씨앗은 오늘 날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줄기가 단단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 나무는 풍성한 그늘을드리워 수많은 영혼을 회복시킵니다.[15]

7. 성 호세마리아는 늘 이렇게 행동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묵상하는 안전하고 성스러운 피난처에 대한 그의 신심은 어린 시절 가정에서 부모님께 배운 것입니다. 이는 로그로뇨 신학교와 사라고사 지방에 있는 산 카를로스 신학교에서 사제 수행을 준비하며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산 카를로스 신학교에는 가시면류관을 두른 채 불타고 있는, 예수님성심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성 호세마리아는 이 형상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 기도문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이후 스페인 내전 기간에있었던 성심(그리스도의 성심)의식의 전야에 새로운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주여, 나는지금 당신의 가슴에 난 상처 곁에서 나를 바라 보고 싶습니다. 나의 자녀들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그들 모두가 당신이 행하시는 일 속에서 살아계신 몸의, 살아있는 지체입니다. 자녀들의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자질과 미덕, 결함을 숙고할 것입니다. 그리고그들을 당신께 차례로 보내며 간청할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라》, 그들을 당신의 성심 안으로 밀어 넣을 것입니다. 나는 후대에올 사람들, 수 세기에 걸쳐 초월적인 가족을 만들어 갈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도 이 세상이 끝날때까지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입니다. 금욕적인 사랑의힘으로 이 땅의 속된 것들과 분리되었습니다. 우리는 제일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 주님의 영혼을 되살립시다. 이제 오푸스데이 안에서다음의 언명을 실현합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한데 모았도다. congregávit nos in unum Christiamor》[16]

성체축성 이후 성 미사에서 호세마리아는, 청소년기에 배웠던 ‘자비로우신 사랑에 대한 기도문’을 조용히 속으로 암송하였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예수의 성심은오푸스데이에 대한 그의 부성을 샘솟게 하였습니다. 이 사랑은 대를 이어 그의 자녀들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원자적 열망은 거룩한 희생으로 채워졌습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세상사나 개인사에서 어려움과 맞닥뜨리는순간에도 우리는 확신과 낙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영원합니다. 전능하고 지혜로우며 자비하십니다. 어떤 순간에도 악으로부터선을 구하십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을 위해 패배로부터 위대한 승리를 구하실 줄 압니다.

8. 1970년대, 믿음과원칙에 중대한 위기가 닥쳐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던 시절. 성 호세마리아는 천국의 새로운 빛을 만났습니다. 그 빛은 주님의 끝없는 도우심 속에서 깨지지 않는 신앙을 확고히 다져주었습니다. 1971년 8월 23일, 성 미사를 집전한 후, 주님께서는 히브리인들에 보낸 편지와거의 같은 말씀을 그의 가슴에 불꽃처럼 새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한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히브 4, 16). 성 호세마리아는 그 순간 곁에 있던 우리들에게 이 말씀을 즉시알리시고 몇 주 뒤 가족 모임의 친밀함 가운데 로마에 있는 자녀들에게도 이를 다시 언급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녀들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것을 말하겠습니다.오푸스데이 주님의 자녀들은 자비에 이르기 위해 깊은 신심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를 향해, 거룩한동정녀이자 우리의 어머니, 우리가 항상 ‘상지의 옥좌’ Sedes Sapiéntiæ 이라 부르는 성모 마리아를 향해, ut misericórdiamconsequámur 자비를 얻기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성모마리아의 한없이 다정한 성심을 통해서, 가장 신성하고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성심으로 나아갑시다. 자비하심으로교회에 그의 권세를 드러내시길, 많은 영혼을 그에게로 이끌며 우리의 길을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하는 힘으로 우리를 채워주시길 간구합시다.”[17]

그러한 확신으로 성 호세마리아는 하느님의 보호하심과 관용에관한 가장 적절한 성경 텍스트를 찾는데 지체 없이 매진하였습니다. 개인적 기도에서 관련 텍스트를묵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고 그의 영혼에 지극한 낙관과 신뢰를 주입한 발견에 대해 다시 언급하였습니다. 이발견을 통해 그는 극심한 고통을 야기한 커다란 슬픔을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나는 거룩한 자비에 대해 말하는, 성경의많은 부분들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이 이 단어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잘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속의 언어가 지칭하는 동정이나 연민뿐 아니라 주님이 그의 피조물에 대하여갖고 있는 일종의 충실함 역시 자비로 이해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움을 보십시오! 우리 주님, 그의 자비하심은 동정심이기도 하기에 우리를 이토록동정하십니다. 또한 충실하신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비로우시며 부모의 사랑으로 우리를바라보십니다.”[18]

성 호세마리아는 어린 시절 이미 묵상했던 성경 말씀을언제나 더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자들을 기뻐하셨습니다. (참고 잠언 8, 31) 그래서 호세마리아는 확신을 가지고오푸스데이를 전진시켰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았습니다.오직 주님의 기쁨만이 오푸스데이가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그의 확신을 더욱 굳건하게 하였습니다.

정의와 자비

9. 예수께서 천상 왕국의 특징을 제자들에게 설명하며 사용하셨던비유 중 성 루카 (위대한 가톨릭 시인이었던 단테[19]가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라 칭한 성인)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길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돌아온 아들의 비유 이 세 가지를 선택해 주님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성스러운 수행을 분명하게 강조했습니다.세 가지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본성을, 온갖 반대를 물리치시고, 연민과 자비로 끝까지 용서하시는아버지의 본성으로 보여 주십니다.”[20]그 한량없는 사랑은 특히아버지의 비유에서 잘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은혜를 저버린 아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바로 용서해 주기위해 하루 하루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회칙 <자비로운 하느님>에서 이 비유의가르침이 어떻게 인류 각자와 모두에게 적용되는지 예리하게 강조합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는 은총의상실, 죄 하나 하나, 사랑으로 맺어진 모든 종류의관계를 파기하는 것에 간접적으로 두루 해당됩니다. (...)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재물은 막대했지만, 그재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누리던 아들로서의 품위였고, (...) 실추된 부자 관계에 대한 각성”이었습니다.[21].

이와 마찬가지로 성 호세마리아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와관련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자비는 우리에게 항상 돌아오라 하십니다. 나의 자녀들이여,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 그를 버리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나약함으로때때로 그를 떠났다면, 뛰어 돌아가십시오. 주님께서는돌아온 아들의 아버지처럼 가장 강력한 사랑으로 우리를 언제나 받아주십니다.”[22]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언급한 대로, 원문에서는 ‘정의’나 ‘자비’라는 단어가 한 번도 쓰이지 않았지만, “정의와사랑의관계, 자비로나타나는그관계가복음서의비유내용에참으로정확하게새겨져있습니다. 정의의엄밀한규범, 하지만 때로는너무도편협한규범을능가해야할때사랑은자비로변모됨이분명합니다.”[23]

성 호세마리아는 어머니들의 행동에서 사랑과 정의의 실천적통합을 발견했습니다.[24]그가 생각하는 주님의 정의는 자비의 깊숙한 곳을 지켜주는것입니다.[25]우리는권리에 기대어 주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구함으로써 주님께 나아갈수 있습니다. 이는 시편의 한 기도문과 같습니다. “Miseréremei, Deus, secúndum magnam misericórdiam tuam 하느님, 당신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시편 50, 2 51,3) 우리는 정의란이름으로 요구하며 주님께 다가가지 않습니다.[26].

10. 많은 사람들이 정의와 자비를 대립함으로 바라봅니다. 교황님께서는 특별 희년을 선포하시어 우리를 이러한 오류로부터 지키십니다. “정의와 자비는 두 가지 대립하는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한 실재의 두 가지 차원으로 충만한 사랑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단순히 의인들과 죄인들로 나누는 율법의 준수를 정의로 여기는 관점에 맞서시며, 죄인들을찾아 그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는 자비의 위대한 은사를 보여 주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를해방 활동과 쇄신의 원천으로 여기셨기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거부당하셨습니다.”[27]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기

11. 전에 언급했듯이 우리의 창조주께서는 신비로운 용서의 빛 가운데 그 특별한 자비의 열매를 심어두셨다고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부활시키시며 주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우리는이해하지 못할 성스러운 이유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또 성 루카는 말합니다: misericordia motus super eam (Lc 7, 13),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다른 이유, 즉 그 여인이 가난하거나 과부라서 혹은 외아들을 둔 어미여서 도우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녀를 향한 긍휼과자비심으로 움직이셨습니다[28].

큰 무리가 죽은 자를매고 나오는 행렬을 이루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이 그 어미의마음을 비통하게 여기며 그녀에게 다가가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말하기도 전에 스승 예수님께서마음의 자비함을 따라 움직이시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구세주의 이 신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모습은우리가 언제든지 그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강조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주님의 자비에 의지해야 합니다.하느님 앞에 우리는 아무 권리도 없습니다. 비록 제가 그분의 아들임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느끼지만, 저는개인적으로 ‘주님, 이것을 주십시오’라고 당당히 요구하지 못할 만한 이유들이 명백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통회의 신음을 뱉으며 그분에게 긍휼을 구하며 그의 자비에 의지해 나아갑니다[29].

성 호세마리아는 말년에보다 큰 믿음과 열심으로 하느님의 용서에 기대고자 했습니다. 그는 1952년 오푸스데이의 활동과 교회 그리고 인류의 필요에 대해 인정하며 예수성심 경당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Cor Iesu Sacratíssimumet Miséricors, dona nobis pacem!이후로 그는 밤낮으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교회를 그리고 신자들의 영혼을 보호해주시길 더욱 구했습니다.

여기 자비의 해를맞아 우리가 하느님께 눈물로 호소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사회가 다시 한 번 계율의 길을 따라 걷길, 신자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타길, 교회의 구석 구석마다명확한 교리와 진정한 자비가 다시 살아나길. 저는 교황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해들이 자비로 가득해 우리가 하느님의 선함과 따뜻함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길! 신자들과 신자가 아닌 모두에게, 우리 가운데 이미 임한 하느님의왕국에 대한 증표로 이 자비의 위안이 함께하길! »[30].

하늘의 아버지와 같은 자비

12. 교회는 그 누구도 제하지 않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 싶어합니다. 그럼에도 교황 프란치스코의 지적처럼, «어쩌면 우리는 자비의길로 향하는 것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항상 정의만을 외쳐야 한다는 유혹이 우리로하여금 이것이 필수적인 첫 걸음임을 잊게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더 숭고하고 의미 있는 목표에도달하기 위해 보다 멀리 가야만 합니다»[31].

우리의 죄에 대해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간구에 이웃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구체적 행위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 Jn 4, 20-21).

교회에서 종종 설교하고실천하는 선행은 우리가 우리들의 좋은 의도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기준 역할을 합니다. «선행이란육체적, 영적 필요가 있는 이웃을 돕는 자선 행위입니다»[32]. 가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은이와 같이 말합니다.교황님께서는올 해 열심을 다해 선행을 실천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설교에 등장하는 선행을 통해 우리는우리가 그의 제자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33].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명백한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남이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Lc 6, 31-36).

육신의 선행

13. 가톨릭 교리는 육신의 선행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배고픈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지붕이 없는 이에게 거할 곳을 제공하고, 벗은 이에게 옷을 입히고, 병든 이와 옥중에 있는 이를 방문하고, 죽은 이를 묻는 것. 이 중 특히 가난한 이에게 하는 적선은대표적인 이웃 사랑의 한 예이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정의로운 행동이기도 하다»[34]. 모든 행위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한 새로운 사랑의계명인 mandatum novum (Jn 13, 34)을 실현합니다. 구세주의 권면을 따라, 교회는 특별히 가난하고, 병들고, 버려지고, 갈곳 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최후 심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품고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Mt 25,40). 또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우화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전 인류를 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14. 교회의 가장 생동감 있는 부분인 오푸스데이에서는 육신의 선행을 결코 포기하지 말 것을 강권합니다. 우리들의 창시자가 직접 자선 사업 초창기에 마드리드 병원의 환자들을 방문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삶을 사는 듯하지만 사실 수치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본보기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측근들에게동일하게 행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또 이 활동들을 성모 마리아께 맡겼습니다. 그렇게 오푸스데이가 성모님의 가난한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충성된 신자들이 있는 곳에서 여전히 이와 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성모마리아의 날인 토요일에 청년들을 대상으로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성금을 모금합니다. 가난한 자들을도우며 성모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35]. 이것은 젊은이들의 마음에 관대함을 심어주어 사랑 가운데 성장하게끔하기 때문에 일종의 교육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피조물을어떻게 돌보시는가 늘 묵상해온 성 호세마리아는 땅의 부를 소수가 나눠 가지고, 문화유산이 동호회의 벽 사이에 갇혀있는 것. 바깥에는 빵과 지식에 굶주려 있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성스러운 인간의 생명이 단순한 물건, 어떤 통계 자료의 숫자처럼 다뤄지는것을 비통해하며,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볼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 조급함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도록계속 부르신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형제이기도 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립된 인생은 없습니다. 모든 인생들이 다른 인생들과 엮여있습니다. 따로 떨어진 소절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하느님께서 우리의 자유 의지를 펜으로 쓰시는 거룩한 시 한 편의 일부인 것입니다[36].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 그리고 어른들이 지독한 가난에 처한 이웃을 알게 됐을 때 그 형제 자매들의 모습에서 가난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배웠습니까! 끝없이 관대하신 주님께서 그들의 영혼에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분만이 많은 이들이 경험한 깊은 변화, 바로가난한 자, 노인, 병든 자와 옥중에 있는 자들을방문하는 열정으로부터 꽃핀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알고 계십니다.......

15. 신실한 신자들과 오푸스데이 협력자들의 자발성을 통해 하느님께서 역사하셨고 이웃을 향한 물질적 도움은시대적 상황과 다양한 장소들의 환경에 따라 새로운 형태들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농촌과 대도시근교에 아주 다양한 환경 출신 사람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전문가 양성 학교들이 세워졌습니다. 가진것이 없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변두리 동네에 무료 진료소와 병원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지금과같은 경제적 위기가 다가왔을 때 많은 형제 자매들이 자신과 그 가족의 물질적 빈궁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원조 사업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저개발국을 대상으로 NGO 단체들이 펼치는 사업들, 선진국들의 식량 은행 등이있습니다.

신실한 신자들과 협력자들의솔선수범으로 인해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선한 마음씨를 가진 많은 그리스도인 그리고 비그리스도인의 도움으로 이 프로젝트의 지경이더욱 넓혀지길 바랍니다.

16. 집이나 병원 혹은 본부나 기혼 회원 평신도들의 가정에서 그리고 어디선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고통 받는 형제 자매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각 환자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의료도움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영적 지원에 정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사제들은 회심의 성사와 성체성사를 해야 합니다. 병자들이 묵상과 감사, 찬양과간구의 기도를 놓지 않도록 될 수 있는 대로 평신도들이 본이 되고 조언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고통의 순간조차 마음 속에 기쁨을 가득 채워주는 묵주 기도와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다른 자비의 표현들을 계속해야 합니다. 병 가운데 있는 형제 자매들은 자신들의 질병과 고통 그리고 그에 따르는 한계들을 하느님께 맡길 때, 성 바울로가 고난 중에 경험하는 구원에 대해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는 것(Col 1, 24)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37].

특별히 심각한 상황이그들을 찾아온다면, 환자들에게 병자 성사를 주고 많은 열매를 맺도록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자비의 성사가 영혼의 죄를 사할 뿐 아니라 육신의 질병에서 회복되게 하고 심지어 완전히 낫게해주는 능력이 있다고 설교합니다[38]. 수세기 동안 이어진 교회의 전통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지 않고성사를 준비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큰 평화와 평안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무지나병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가족이 의식을 잃고 나서야 사제를 부르거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위한 교리 교육이필요합니다!

17.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떤 자선 행위들은 표현이나 적용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요즘은 나그네들을 돌보는 일을 “지붕이 없는 자에게 거할곳을 제공하기”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이것은 일자리나 더 나은 삶의 질을 찾아 모국을 떠나온 이민자들을 돕는 것을 의미하게 됐습니다. 주님의제자라면 이 형제 자매들, 가끔은 그들의 가족 전체에게서 관심을 거두면 안됩니다. 저는 특별히 종교적 이유로 박해를 당한 이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의망명은 우리들 안에 성인들의 공동체란 어떤 의미인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각국의 수장들과 자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필요를 모른 척 하지 않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도록 관심을 촉구하셨습니다.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새로운 형태의가난과 연약함에 다가가기 위한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만질 수 있는즉각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거처가없는 자, 약물에 의존하는 자, 난민들, 원주민 부족들, 점점 더 고독하고 버림받는 노인들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이들의 어머니와 같은 국경 없는 교회의 성직자로서 이민자들은 저에게 특별한 과제로 다가옵니다»[39]. 교황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문제를 자비의 해를 맞이해 급한 과제로 삼고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하셨습니다[40].

우리 모두 교황님의말씀에 메아리가 되어 친척들,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이 각자 처한 상황과 형편에 맞게 이 권고를 항상마음에 품도록 합시다. 기도하는 것 외에도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이 긴급 상황을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부터 거처, 일자리혹은 경제적 도움을 제공하는 것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합니다. 언제나 개인적 책임감을가지고 이 선한 사명에 동참하는 방법 중 하나는 교구 교회들의 솔선수범을 뒷짐지고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각 교회마다 이 사명을 감당할 것을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이 협력자로서또 친구로서 이민자들을 돕는 활동에 구체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물질로 섬기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수고를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 드립니다.

영적 자비의 사업

18. 성 호세마리아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사회가 비참과 가난, 혹은 고통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혜롭게 행사하는 능력이 더욱 시급해집니다. 겉보기에 모두가 안락해 보이는곳에서 위로가 필요한 곳을 찾아낼 줄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의행위는 물질적 도움을 제공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정도와별개로 영적 도움도 필요합니다. 교황께서는 “영적으로돌봄을 받지 못하는 것이 가난한 이들이 겪는 가장 큰 차별이다”라고 개탄하십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항상 영적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업을 장려해왔습니다. 이는어느 때이건 현실적이고도 당면한 과제이지요. “필요한 이에게 조언하기, 무지한 자를 가르치기, 잘못을 범하는 자를 바로잡기, 슬픈 이를 위로하기,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기, 괴로움을 주는 자들을 인내하기,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하느님에게 기도하기”

이 영적인 사랑을실천하려면 세심한 관찰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고독과 몰이해, 박해, 저주와 비방으로 고통 받는 남녀들이 넘쳐나는 오늘날, 천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알지 못한 채 의심에 가득 찬 사람들이 서로 말다툼을 벌이는 오늘날 매우 필요한덕목이지요. “고통과 빈궁에서 비롯된 재난을 없애기 위한 사회적 원조가 일반화되었고 이 덕분에 이전에는꿈도 꾸지 못했던 인도주의적인 성과들이 오늘날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인 방안은 영적인문제와는 다른 층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이 직접 이웃을 만나 행하는 다정함이 주는 인간적이고도초자연적인 힘은 사회적 원조로 절대 대체될 수 없습니다. 이들 이웃은 가까운 동네의 가난한 사람이거나거대한 병원에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환자일 수 있습니다. 그 이웃은 한 부유한 여성으로, 잠시 동안 나누는 다정한 대화, 고독을 달래기 위한 교우의우정, 의심과 회의를 이겨내기 위한 영적인 보호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한 걸인 여인에게일어난 일을 떠올려 봅시다. 성 호세마리아는 그녀에게 단지 영적인 봉헌과 사제로서의 인간적 애정을주었을 뿐이지만 그에 대한 답으로 여인은 여생 동안 선행을 베풀기로 결심합니다. 훗날 어느 병원에서그녀를 만난 성 호세마리아는 그 걸인 여인이 주님을 위한 사업에 생을 바친 것을 보게 되고 그녀를 주님의 미래의 딸들 가운데 첫 번째로 부름을받은 자로 평합니다.

19. 그리스도인이 연대와 우애로 행하는 갖가지 활동 중에 몇 가지만을 언급하겠습니다. 무지한 이를 가르치고, 필요한 이에게 조언을 하고,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이는 정성을 담은 사랑의표현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 모두에게, 특히 가족구성원과친구, 동료, 지인 등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이러한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지닌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자비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창설자 성 호세마리아는 이를 다음과같이 요약하셨습니다.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리고 자주 강조하시길, 하느님과 사람들의 가장 큰 적은종교에 대한 무지이고 오푸스데이의 과업은 “위대한 교리의 교육”,즉 교회가 전하는 구세주의 말씀을 모두에게 들리게끔 하여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유념하십시오. 당신은 사도로서 다음과 같은 덕을 널리 퍼뜨릴 임무가 있습니다. 선과 빛, 열정, 베품, 희생정신, 끈기 있는 노동, 깊이 있는 학업의 자세, 광범위한 헌신, 충실한 하루하루, 기쁨에서 우러나온 교회를 향한 절대적인복종, 온전한 사랑...” 이 모든 계획에는 많은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리와 영성, 사도에 관한 교육을 제공해야합니다. 직업과 사회, 문화 등 우리의 의무가 놓인 다양한 영역을 복음의 진리가 밝게 비춰주는 것은 아주 커다란 기쁨입니다.

이번 자비의 해 동안에우리의 임무에 정진하여 많은 영혼들이 예수그리스도와 성모의 전당인 교회의 온기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합시다. 우리한 사람 한사람이 친구와 동료, 지인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수단에 더 가까워지도록 개인적으로 노력한다면하느님의 도움으로 이 임무를 달성하게 될 것입니다.

20. 필요한 이에게 좋은 조언을 하는 방법 역시 매우 다양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상에재림하신 그리스도의 행적이었음을 성 호세마리아는 쉼없이 우리에게 되풀이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사도행전의 첫 구절 “예수께서 행하며 가르치기를 시작하셨다”[41]에서 볼 수 있듯이 행동으로 보여주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스스로 행함을 보여준 이후에야적절한 말로 설명할 순간이 다가옵니다. 이는 뜻이 분명하고 사랑에 가득 찬 말로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우리의 친구와 지인의 귀에 전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듯이 우정과 친밀함에서 우러나온전도가 되어야 합니다.

행동과 말의 일치는매우 큰 힘을 발휘합니다. 때로는 복음서[42]에서가르치듯이 우애에서 비롯되어 바로잡는 형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귀하고 용감한, 큰 힘을 갖는 자비의 행동은 사랑과 친구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타인의 육체적·물질적 안녕을 돌보고 염려하는 데에 무척 주의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형제자매들의 영적 책임에 관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입을 다뭅니다.초기 교회와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을 지닌 공동체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입니다. 그곳에서는사람들이 서로의 몸의 건강뿐 아니라 영혼의 건강과 최후의 운명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 그리스도의사랑이 지닌 이 영적인 차원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어 말하시길, “악을 마주했을 때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것은 인간적 존중 때문에 혹은 단순히 안락을 추구하여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안주하는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은진실에 모순되며 선을 향한 길을 따르지 않는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으로부터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지키지 않습니다.”

성 호세마리아에게감사를 표합시다. 성 호세마리아께서는 우리에게 이 복음의 실천이 지닌 효력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랑에서 우러나와 이웃을 돕는 이 뛰어나고 선하며 습관적인 실천은 진실로 겸허하고 매우 신중하게 행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행하는질책은 절대 비난이나 나무람의 정신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질책은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되고, 형제의 안녕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데에서 싹틉니다. 성 바오로사도는 말씀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영적인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43]

베네딕토 16세는 이어 말하셨습니다. “개인주의에 물든 우리의 세상에서형제들이 서로를 바로잡아주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아 신성함을 향해 함께 걸어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21.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 또한 사랑을 실천하는 훌륭한 방식입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복음서6, 37-38) 주인에게 진 큰 빚을 탕감받고 나서 자신이 동료에게 빌려준 적은 돈은 기어코 받고자 했던 사람의 일화를 생각해봅시다.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에게 어떻게 말했습니까? “악한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오 복음 18, 32-35).

타인이 끼친 손해를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에 걸맞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따라서불공평하며 무례한 타인의 행동으로 입은 손해와 모욕의 기억을 간직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행동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자신이 입은 손해를 따지기 위한 장부를 만들어 두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에게 적절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예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 루카는주님의 수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해골’이라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복음서 23,33-34).

물론 이렇게 용서하는행동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이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의 초창기는 물론 오늘 날에도 자비로울 뿐 아니라 자신의 박해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있었습니다. 이들은 우리 또한 타인을 용서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선상에서 성 호세마리아는 언제어디서든지 용서하겠다는 올곧고 변함없는 결단을 내리셨고, 이를 행동과 말로 보여주셨습니다.

“적을 미워하지 않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 복수를 단념하기, 원한 없이 용서하기.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은 당시에 보기 드물고 너무나 영웅적이어 상궤에서 벗어난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 보건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조물인인간은 이토록 편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고 그 사업에 모든 기독교인들을참여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저와 같은 신도들에게 크고 진실하며 고귀하고가치있는 사랑을 가르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듯이 우리는서로를 사랑해야합니다. 우리가 지닌 거친 성정을 이겨내고 예수님의 성스러운 방식을 모방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고 더 높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자비의 사업을 바탕으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굶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는지. 우리가 나그네를 따뜻이 맞아들이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었는지.우리가 병들고 가두어진 자와 함께하였는지[44]마찬가지로 우리는 질문 받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빠트리고 때로는고독의 원천이 되는 의심을 이겨내는 데에 우리가 도움을 주었는지. 무지 속에서 살고 있는 수백만의사람들, 특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갖추지 못한 어린 아이들을 일깨울 수 있었는지. 외롭고 슬퍼하는 자와 가까이 있었는지.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사람을 용서하고 폭력을 낳는 화와 미움을 물리쳤는지. 우리에게 그토록 큰 인내심을 보여주신 하느님의모습을 닮아 참을성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는지. 마지막으로, 기도속에서 주님께 형제자매들의 가호를 빌었는지. 이 작은 행동 하나하나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성체는 박해당하고 상처 입은, 채찍질을 당하고여위고 쫓기는 몸으로 다시금 우리 눈앞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그 육신을 알아보고 만지고 간호할 수있도록 말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삶이저물어 갈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을 것이다.”

고해성사의 사도직

22. 특히 중요한 또 하나의 영적 자비의 사업은 사람들이 원죄로 인해 잃어버린 하느님과의 우정을 회복하도록돕는 것입니다. 성 호세마리아 뿐만 아니라 복자 알바로 또한“고해성사를 하는 사도의 임무”를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에게 자주 이 점을 말해왔습니다. 스스로의영혼을 깨끗이 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고해성사를 자주 수행하지 않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와 사랑 속에서 발전해 나아갈 리가 없습니다.

교황께서는 이 성사에대해 자주 언급하십니다. 희년 모임 칙서에 다음과 같이 적으셨습니다. “우리는 화해의 성사가 중요함을 다시금 확신합니다. 왜냐하면화해의 성사를 통해 우리는 자비의 위대함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참회하는 사람모두에게 진정한 내적 평화의 원천이 됩니다.”

오푸스데이의 창립자인성 호세마리아의 충고를 함께 떠올려봅시다. 성 호세마리아가 휘하의 사제들에게 하신 이 조언은 모든성직자들에게 해당됩니다. “오푸스데이의 사제들의 가장 큰 열정은 교리를 전파하여 사람들을 인도하는것입니다. 즉, 설교하고 고해성사를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지치지 않고,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여러분의모든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45].세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 나의 아들 딸의 임무는 그들의 형제인 사제들에게 일거리, 즉 기쁨을 가득 안기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많은 사제들이자신의 임무에 다가가게 됩니다.”

23. 교황님의 기록에 따르면 고해 사제들은 그 자체로 “주님의자비의 진정한 징표”가 됩니다. “준비 없이 고해사제가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용서를 구하는 참회자가 될 때 진정한 고해사제가 될 수있습니다. 절대 잊지 맙시다. 고해 사제가 되는 것은예수님 스스로 하시던 임무에 참여하여 용서하고 구원하는 신성한 사랑이 지속됨을 확증하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이어 말씀하십니다. “우리 중 누구도 성사의 주인이 아닙니다.주님의 용서를 실천하는 충실한 종일 따름입니다. 모든 고해 신부는 신실한 사람들을 따뜻하게맞아들여야 합니다. 우화에 등장하는 탕아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그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을 맞이하러 달려갑니다. 고해 신부는 집으로 돌아온참회하는 아들을 껴안고 그를 만난 기쁨을 표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고해신부는 또한 기꺼이 집밖의 다른 아들을 만나러 나갈 것입니다. 기쁨을 모르는 그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주님의 끝없는 자비 앞에서 가혹한 심판은 부당하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입니다.”

나의 자녀인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자비를 실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합시다. 사제분들은최대한 많은 시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데에 바칩시다. 그리고 신도들은 끊임없는 노력으로친구와 지인들의 영혼을 돌봅시다. 진실되고 사심없는 사랑을 통해 그들이 기쁨과 평화의 성사로 큰결실을 얻을 수 있게 도웁시다.

24. 더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칙서 자비의 얼굴을 읽고깊이 묵상하시어 여러분 스스로 결론을 이끌어 내시길 바랍니다. 칙서 안에는 성지순례에 대한 이야기도있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가 내리는 대사(大赦)의 은총을 얻고 뒤이은 몇 달 동안 성스러우신 동정녀 마리아를 향한 자녀로서의 따뜻한 신심을 충만히 합니다. “이번 성년 동안 성모 마리아의 따뜻한 시선이 우리와 함께 하시어 우리 모두가 주님의 애정이 주는 기쁨을다시 발견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인간이 되신 주님의 신비를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이해하십니다. 그의 모든 삶은 자비의 구현으로 이루어졌습니다.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성스러운 자비의 성지로 들어가셨습니다. 마음속 깊이 주님의 사랑의 신비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온 사랑을 담아 여러분을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아버지

하비에르

2015년 11월 4일로마.

[1]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40항.

[2]교황 프란시스코, 회칙 「찬미 받으소서」, 2015. 5.24., 77항

[3]오푸스데이 프레체스 기도

[4]교황 프란시스코, 교서 「자비의 얼굴」, 2015.4.11.,2항

[5]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 1980. 11. 13., 1항

[6]교황 프란시스코, 교서 「자비의 얼굴」, 2015.4.11., 5항

[7]성 호세마리아, 서간,1930. 3. 24., 1항

[8]교황 프란시스코, 교서「자비의 얼굴」, 2015.4.11., 7항.

[9]성요한바오로 2세, Litt. enc. 자비로우신하느님,30-XI-1980, 8항

[10]복자바오로 6세, 일반담화, 14-IV-1976.

[11]성호세마리아, 서간 25-I-1961, 1항.

[12]성호세마리아, 묵상록, 11-IV-1952.

[13]상동.

[14]교황프란시스코, Exhort. ap. 복음의기쁨, 24-XI-2013, 279항.

[15]성호세마리아, 서간 25-I-1961, 3항성호세마리아.

[16]성호세마리아, 묵상록, 4-VI-1937.

[17]성호세마리아, 가족모임기록물, 9-IX-1971.

[18]성호세마리아, 가족모임기록물, 14-VI-1972.

[19] Cfr. 단테알리기에리, 제정론, 1.

[20]교황프란시스코, Bula 자비의얼굴, 11-IV-2015, 9항.

[21]성요한바오로 2세, Litt. enc. 자비로우신하느님, 30-XI-1980, 5항.

[22]성호세마리아, 가족모임기록물, 27-III-1972.

[23]성요한바오로 2세, Litt. enc. 자비로우신하느님, 30-XI-1980, 5항.

[24] Cfr. 성호세마리아, 주님의친구들, 173항

[25]성호세마리아, , 309항.

[26]성호세마리아, 가족모임기록물, 11-IX-1971.

[27]교황프란시스코, Bula 자비의얼굴,11-IV-2015, 20항.

[28]성호세마리아, 가족모임편지, 25-IX-1971.

[29]성호세마리아, 가족모임편지, 9-IX-1971.

[30]교황프란치스코, 대칙서Misericordiæ vultus, 11-IV-2015, n.5.

[31] Ibid., n. 10.

[32]가톨릭교회의교리문답, n, 2447.

[33]교황프란치스코, 대칙서Misericordiæ vultus, 11-IV-2015, n.15.

[34]가톨릭교회의교리문답, n. 2447.

[35]성호세마리아, 교육, 9-I-1935, n. 196.

[36]성호세마리아, Christ is passing by,n.111.

[37] Cfr. 성요한바오로 2세, 교황서간Salvifici doloris,11-II-1984.

[38] Cfr. 가톨릭교회의교리문답, n. 1520.

[39]교황프란치스코, 교황권고Evangelii gaudium,24-XI-2013, n. 210.

[40] Cfr. 교황프란치스코, 삼종기도담화, 6-IX-2015.

[41]사도행전 1, 1

[42]마태오 18, 15-17

[43]갈라티아서 6,1

[44]마태오 25, 31-45.

[45]시편 12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