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일깨우는 다이너마이트

(...) 그곳에서 저는 '길'이라는 작은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제게 마치 ‘영혼을 일깨우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았습니다.

저는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한국 '가톨릭다이제스트'의 상냥하지만 끈질긴 요구에 못 이겨 스페인에서 보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을 거슬러 더듬어 봅니다.

1968년이 되던 해, 저는 고등학교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수학, 화학, 물리 등의 과목을 공부하고 또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저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자기와 함께 오푸스 데이 센터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저를 이끌었습니다. 사실 저는 오푸스 데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요. 그곳에서 저는 '길'이라는 작은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제게 마치 ‘영혼을 일깨우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았습니다.

“그대의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십시오. 유익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나중에 올 사람을 위하여 길을 내십시오. 그대의 믿음과 사랑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십시오. 불순한 미움의 씨를 뿌린 자들이 남긴 더럽고 비열한 흔적을 그대의 사도적 삶을 통해 지워버리십시오. 그리고 그대 가슴 속에 간직한 그리스도의 불꽃으로 세상의 모든 길을 밝히십시오.”('길' 중에서)

그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어떤 느낌이 아니라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어떤 것과도 다른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한 인간이 하느님의 계획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마주하였을 때 그의 영혼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 지…. 그것은 밝고 눈부신 깨달음이었습니다. 반드시 굉장한 이적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계획과 마주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생한 각성을 통해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사제나 수도자에게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열려있다는 것을 그 때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베드로, 안드레아, 요한, 야고보 그리고 그 밖의 제자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결코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지만 삶의 핵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가족과 일과 친구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했고, 그들이 속한 마을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았으며, 설령 그들이 몰랐다 할지라도 국가에 기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의사라는 직업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품위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면서 의대진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던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오푸스 데이 센터에 처음 발걸음을 하고 난지 바로 얼마 안 되어 저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성인, 즉 진정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의 놀라움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혹은 이후 제가 원하는 무엇을 하는 동안이라도 제가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아신다면….’, ‘하느님께서 내가 얼마나 바쁜지를 아신다면….’

그런데 주님께서는 저의 개인적인 처지와 가능성을, 또 저의 꿈과 한계를 잘 알고 있는 바로 그때 저에게 성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5,48)는 말씀을 여러번 읽었습니다. 저는 매사에 신중을 기했고 저의 일상생활을 하느님께 봉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좀더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들을 통과하는 것이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왜 내가 그러한 일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새로운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드리드에 있는 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학교와 병원을 오고 가며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의학 공부를 마친 후, 다른 전공의처럼 의사로서의 앞날을 준비하고 있던 중, 저는 일본에 있는 오푸스 데이의 사도직사업을 위해 일본에 갈 것을 부탁 받았습니다. 저는 그전까지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 그대로 멀고 먼 나라 극동아시아의 일본에 가게 되었습니다.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15년이 흘렀습니다. 일본어를 배우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으며, 또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수 많은 개종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모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호세마리아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모험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어떤 사람의 꿈보다 더 크고 더 흥미진진합니다.

먼 과거는 아니지만, 1975년 당시 저는 일본에서 문자 그대로 정말 ‘외국인’이었습니다. 거리에서 저와 마주친 일본인들의 놀라움은 대단했습니다. 특히 시골일수록 그 정도는 더 심했지요. 그때까지 스페인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저를 당연히 미국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성패는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의미를 그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은 늘 아름다웠습니다. 이 시기에 오사카, 교토, 나가사키, 오이타 등의 도시에 오푸스 데이 센터가 지어졌고 선교사업도 확장되었습니다. 성스러운 믿음의 씨앗이 모든 곳에서 싹을 틔우고 이질적인 문화적, 정신적 전통에 융화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제 인생의 ‘모험’은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거기에 전혀 후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더 많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성직자로서의 저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로마에서 은총의 귀중한 3년을 보내고 다시 일본에 돌아왔을 때 제 친구들은 온통 검은색 사제복 차림으로 바뀐 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의 겉모습이 조금 바뀐 것만으로도 저는 그들에게 이미 멋진 교리 교육을 한 셈이지요. 새로운 책임을 맡게 되어 저는 필리핀으로 갔고 지금은 홍콩에서 살고 있습니다.

과거를 다시 돌아보아도 모든 시간 제 손을 잡고 이끌었던 분은 바로 하느님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성서에서 다음 구절을 읽을 때면 거기에서 언제나 압축된 제 인생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루가14,16-17)

고귀하고 아름다운 파티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느님이 계획하고 불러주신 모든 초대에 “예”라고 대답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기도 하셨지만 또한 베다니아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도 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는 일이 잘 안 풀려 어려울 때나 혹은 순조로울 때나 아주 작은 일에서 거룩한 의무를 다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호세마리아 성인께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정말로 성인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매 순간 작은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십시오.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하십시오.” ('길' 중에서)

하느님께서 부르시지 않는 사람은 없으며 거룩함은 전 우주의 보편적 소명입니다.

“하느님이 직장에서 그대를 찾으셨다고요? 그대는 놀랄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이것이 아주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하고 있는 일 가운데서 저를 찾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물질하고 있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셨고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오를 찾으셨던 것과 같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바울로는 그리스도인의 씨를 아주 없애버리려고 박해 활동에 열중해 있을 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길' 중에서)

일상의 노동과 평소 수행하는 직업이야말로 완전함에 이르는 우리의 거룩한 소명의 한 부분입니다. 오푸스 데이는 이렇게 우리를 거룩함에로 이끄는 보편적 소명을 깨우쳐주고, 정직하게 직업활동을 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제 글을 마무리해야겠군요. 지금까지 제 자신의 나약함과 투쟁하고 저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노력해온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과연 거룩함이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스스로 답하면서 글을 맺습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은 하느님과 그가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것, 그리고 우리를 이루고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과거 어느 날, 아마도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저와 나누고 싶어 오푸스 데이 센터로 절 초대했던 친구처럼 말입니다.

라몽 로페즈 몬시뇰

(Source: https://www.cadigest.co.kr/digest/200304/meet.htm)

한국 가톨릭다이제스트 2003년 4월호 "내가만난가톨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