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푸스데이 단장이 사순절에 보내시는 편지

하비에르 에체바리아 주교님이 사순절을 맞이하여 편지를 써 보내셨다. "교황 성하께서 우리는 항상 이웃을 하느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셨듯이 대하려고 노력하고 이웃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백색의 십자가에 못박음 Marc Chagall (1938)

사순 시기는 "자비의 샘이신 주님께 나아가는 내적 순례를 위한 특별한 시간입니다. 이 순례 동안 주님께서 친히 가난하고 메마른 우리 마음에 함께 하시며, 부활의 강렬한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2006년 사순절 서신).

교회는 사순절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마음을 준비하라는 초대를 합니다. 전례는 앞으로 다가오는 나날들을 강도 높고 꾸준한 기도로 봉헌할 것을 권합니다. 후한 고행을 바치고 이웃 고뇌를 덜어줄 것을 권합니다. 마지막 점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서신에서 강조하시려고 선택하신 복음과 뜻이 같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우리는 성 마태오의 말씀을 응용해 우리 일상 생활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우리 가족 안에서, 우리 직장에서, 유식을 취할 때, 사회 모임과 활동 등에서 적용해야 합니다.

교황 성하께서 우리는 항상 이웃을 하느님께서 군중들을 바라보셨듯이 대하려고 노력하고  이웃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단 한 명도 제외하지 않고 모두를 위해 하느님께서 고귀한 피로 값을 치르고 속량해 주셨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1 코린토 6,20). 이천 년 전처럼 “예수님의 자비로운 눈빛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고 성스러운 계획안에 모든 사람의 구원의 부르심이 포함돼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지 잘 알고 계시고 군중을 보고 동정심을 느끼십니다.

지금, 하늘과 교회에서 그분 제자들을 (여러분과 나) 동원해, 모든 여성들과 남성들에게 자비로운 눈길을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늑대로부터 보호하려고 그의 목숨까지 바치십니다. 예수님의 주시하는 눈길은 개개인과 군중을 향해있습니다. 속죄를 위한 제물로 자신을 바치고 우리 모두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대리고 가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2006년 사순절 서신).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셨을 때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눈을 떼시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하늘과 교회에서 그분 제자들을 (여러분과 나) 동원해, 모든 여성과 남성에게 자비로운 눈길을 보내십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 앞에 대리고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성 요셉 축일을 두고 열의를 더욱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보는 것을, 또한 우리 주위나 세상을 잠시 생각하기만 해도 얼마나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한 것인지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난폭한 행위들을 보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보복적인 행위를 취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 공존을 위한 많은(크고 작거나) 도전을 풀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더욱 많이 사랑하고, 더욱 좋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의 간곡한 권고는 이렇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 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로마 12,17-21).

성 호세마리아는, 오래 전부터 성 바오로의 가르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악은 풍성한 선 안에 빠져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밭고랑 864번). 그리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것은 소극적인 운동(캠페인) 문제거나 무엇인가에 반대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낙관적이고 젊음과 기쁨과 평화를 가지고 저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직 모르는 사람, 그분을 단념한 사람,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는 사람, 모두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밭고랑 동일번호).

이러한 태도는 수동적이거나 패배주의적 정신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무관심이나 비 활동으로 적극적인 사람이 되야 합니다. 우리는(그리스도인) 사회의 일원으로서 합법적인 (정당한) 의도로 공격적이거나 권리를 양보하거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이 개개인과 국가의 공익을 위해 이웃과 우리의 시민 권리를 주장해야 합니다. 신앙이 무엇이던 자연 도덕률을 인정한다면 모두 힘을 모아 오늘날 많은 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세속주의 사상(事象)의 활동을 저지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동면(冬眠)에서 깨어나 개인주의 사고를 뒤로 하고 현대 문화와 사회 분야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인 자유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습니까? 이런 귀중한 활동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기주의를 떠나 하느님의 권리와 인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까? 

이런 활동은 꾸준한 전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깊고 지속적인 변화로 연결될 여면 개개인의 약속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회의 개선은 개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투쟁의 결과에 좌우됩니다. 성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 15,19).

성 바오로는 사순절에 잘 어울리는 조언을 줍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로마 12,9-13).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난국을 적극적으로 해결해갑시다. 왜냐하면: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에 애덕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교황 베네딕토께서 발표하신 첫 회칙에서 지적했듯이 “아무리 공정한 사회에도 사랑은(caritas)항상 필수적입니다. 사랑 나눔의 필요성은 사회의 평등을 존중한다는 그 어떤 국가도 정책으로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제거하려는 사람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제거하려고 합니다. 도움과 위로를 요구하는 고통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외로움도 항상 있을 것입니다. 물질적인 난국도 항상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8번).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난국을 적극적으로 해결해갑시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우리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1요한 4,20).

성 호세마리아는 이런 (이웃에게 대한) 걱정들이 바르고 효율적인 결실을 맺으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안에 있는 모든 이기심을 버리고 진정하게 이웃의 고통, 걱정, 즐거움이 우리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 그것은 너무 어려워요’ 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 호세마리아의 답을 묵상하시고 실행 해보십시요: “들어보십시오. 만약에 그대가 하느님의 은혜로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대 자신의 이해관계를 한쪽으로 미뤄두며, 그대는 하느님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게 될 것이고, 바로 오늘 전쟁이 치러지고 있는 싸움터에서 교회를 돕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거리에서, 공장에서, 작업장에서, 대학에서, 사무실에서, 그대 자신의 주변에서, 그대의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밭고랑 14번).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사람은 사랑하기 위해서 조건을 붙인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하거나, 자신의 성취 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지적하십니다. 따라서 “이 사랑을 정화를 해서 금욕, 재계, 치유의 오르는 길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5번). 오로지 이 길만으로 이기적인 사랑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보내시는 사랑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간 양치기나, 잃어버린 동전은 찾는 여인,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아버지의 비유를 해서 말씀하셨을 때 단순하게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본성과 활동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가장 급진적인 표현입니다.” (회칙의 12번). 성 호세마리아는 십자가를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바라 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왜냐면: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에 대한 넘치는 사랑의 마음으로, 인간과 사물의 가치에 대한 질문 자체가 난색하고 말이 불필요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인류를 일으키고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리스도님이 지나가고 계십니다 165번).

 우리는 성 요셉 축일을 앞두고, 성 요셉의 고통과 기쁨을 묵상한 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진실한 충성심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성 호세마리아에게 우리 마음에 ‘정신적인 편견’을 심어서 항상 이웃과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게 해달라고 간구합시다. 우리는 홀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 요셉을 본받아 즐겁게 봉사합시다.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맑은 사랑을 베풉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