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관상기도 (I)

관상기도를 한다는것은 하느님의 눈빛을 받아 즐기는 것이다. 하루 종일 주님과 함께 있다는것을 깨닫게되고, 맏일을 할때 다른 시야를 가질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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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희 묵상의 주제는 저희가 길거리를 걸으며, 직업안에서 관상기도를 할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것, 또 하루 종일 하느님과 대화를 나눌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히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충실히 예수 스승님의 발자욱을 따라가려면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성 호세마리아, 하느님의 친구들 238). 



이세상안에서 성화를 찾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직업을 기도로 만들어 항상 관상의 영혼이 되어야만한다. “저희는 일상생활안에서 주님을 찾지 못한다면 결코 찾을 수가 없기 때문” 이다 (성 호세마리아, 대화 114).

성호세마리아의 이 가르침을 우리는 천천히 묵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관상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다음 기회에는 관상기도를 일안에서, 일상생활 안에서 찾는 방법을 찾아 보도록 한다.

나자렛에서 처럼, 초대 신자들 처럼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 일의 깊은 의미와 완전한 가치를 얻게 하는 것이다. 나자렛에서의 예수님의 숨은 생애는 기도와 일에 전념하셨던 그리스도의 평범한 삶의 신성과 인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업, 가정, 사회생활이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에 생활에 결코 지장이 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그시간을 하느님과 대화를 나눌수 있는 순간으로 만들고 일과 기도의 차이가 없어질때까지 우리는 성장 할수 있다.


일상 생활안에서의 관상 기도는 스승이신 예수님의 발자울을 따라서 초대 신자들처럼 “산책할때, 대화 나눌때,  휴식을 취할때, 일하거나 책을 읽을때, 기도를 하게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양탄자 Stromata 7,7). 성 대 그레고리오는 “관상의 은총은 높은 이들이 받고 낮은이들이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높은이들과 많은 낮은이들, 수도자들과 기혼자들. 관상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지위는 없다. 누구나 마음으로 그 은총을 받아드릴수 있다” 고 가르치신다. (성 대 그레고리오,  에제키엘에대한 강론, 2.5.19).

교회는, 특별히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그리스도를 세상 모든곳에서 전하며 그리스도적 정신으로 이 세상을 바꾸는 사명을 받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이 가르침을 자주 알려 준다. “일상적인 일은 그리스도님과의 일치를 이룰수 있는 기회로 만들수 있는 소중한 장소이며, 성덕을 쌓고 사랑이 담긴 행동으로서 성화를 찾을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정신은 직업을 변화시킬수 있게 하고 하느님과의 관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호세마리아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의 강론).

하느님의 자녀들의 관상기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천상 영광 안의 하느님을 뵙는 것을 교회는 지복 직관이라 부른다” (교리서 1028) 라고 가르친다. 완전한 지복를 누리는 것은 천국에서 얻을 수 있고 이 세상에서는 미완성적인 관상을 받을 수 있다. 지복과 관상은 다르지만 관상도 하느님을 볼수 있는 은총이다. 은총이 영광과 틀리지만 하느님의 영광의 한 부분을 받는다는 것이 은총이듯이 말이다.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1 고린토 13,12) 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관상은 이세상에서는 아직 거울에 비추어진것 같다. 하지만 살아있는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가능하다.  “신앙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순례해 가는 몰표인 지복 직관의 기쁨과 빛을 미리 맛보게 해 준다” (교리서 163).

관상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을 맛보게하는 지식이고 이세상의 창조물과 계시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고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이것을 “사랑의 과학” 이라 부른다. 관상은 진실을 깨달음이고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랑으로 깨닫는 것이다.

묵상기도는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그대는 내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해서죠?’ 무엇에 대해서냐고요? 그분과 그대 자신에 대해서, 기쁨, 슬픔, 성공과 실패, 위대한 야망, 일상적인 걱정거리들, 심지어 그대의 나약함에 대해서도! 그리고 감사와 청원, 사랑과 통회. 간단히 말해, 그분을 알고 또 그대 자신을 알기 위해서 즉,‘사기기 위해서’!” (성 호세마리아, 길, 91).

신앙생활안에서의 묵상은 기도를 아버지 하느님에대한 신례를 통해 간단하게 만든다.  기도를 위한 특별한 말이나 행동이 필요 없게 된다.  “입이 표현을 못하게 되니 말이 필요 없습니다. 생각도 멈춤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 보는것 뿐입니다.” (성 호세마리아, 하느님의 친구들 307).

이것이 관상기도이다, 능동적이지만 말이 없고, 열정적이고도 평안하고, 깊고도 간단합니다. 주님의 뜻을 행동으로서 성실하게 찾으며 하느님의 현존을 찾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처음에는 화살기도 한번, 또 한번, 한번, 그 열정이 모자르다고 생각 될때 까지, 그리고 말이 필요 없을때 까지: 그렇게 하느님과의 친교를 맺고 쉬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으며 하느님을 바라 보게 됩니다”. (성 호세마리아, 하느님의 친구들, 296). 이것은 특별히 기도 시간에만 일어나는 은총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건 안에서, 우리의 일을 최선을 다하여 할때 항상 받을 수 있다.

성령의 영향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은총을 받은 영혼에 사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라 불러질수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신비를 말로 표현 할수 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성부께서 영원으로부터 성자를 내시고 살아계신 사랑이신 성령을 발하신다고 고백한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우리는 자녀로서 그분의  삶을 살게 된다. 성령은 우리를 인성을 받으신 성자와 하나가 되게 해주시고 우리가 신성에 참여할수 있게 하신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어 (...)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의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4,4-6).

우리는 성자와 하나됨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게 되고 사도들처럼 모든이를 부르는 사제직에 참여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