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와 자아 통제 (1부)

호세마리아 성인은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아이들에게 금욕을 가르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가족에 관한 연속 기획으로 새로 나온 글. 이 중 5개가 영어로 소개되었다.

부모가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 아이들이 왜 최신 유행을 따르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지 못하게 하냐고 되묻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이에 대한 흔한 대답은 종종 간단하게 “왜냐하면 우리 형편에 맞지 않으니까”, 또는 “너는 숙제부터 끝내야 하니까”, 좀더 발전된 대답으로는 “그렇게 되다가는 너 기분에 끌려 다니게 되니까”일 것이다.

이들 모두 어느 정도까지는 잠시의 곤경을 면할 수 있는 대답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 눈에는 절제라는 미덕이 보이기보다는 단순히 그들을 끌리게 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절제는 다른 도덕적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가치이다. 이는 한 개인이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감정이나 기분, 선호와 갈망, 그리고 가장 내밀한 성향까지도 조절할 수 있게 돕는다. 다시 말하면, 절제는 물질(goods)을 사용하는 것과 더 높은 선(good)에 대한 열망 사이에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한다. [1] 이러한 맥락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절제를 감각적 그리고 영적 생활 모두의 근원이라고 했다. [2] 사실 우리가 진복팔단을 주의 깊게 음미해보면, 여덟 가지 행복의 원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절제와 관련이 있다. 절제가 없으면 그 누구도 하느님을 볼 수 없고, 위로를 받지 못하고,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부정의를 인내심 있게 참을 수 없다. [3] 절제는 인간의 마음이 모든 도덕적 가치들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자아 통제 (Self-mastery)

기독교는 쾌락(pleasure)이 '허용된다'고 말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쾌락(pleasure)을 인간 본성의 일부로 만드셨으므로 긍정적인 선 (good)이자, 우리 자신의 성향을 만족시키는 결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원죄에 대한 자각과 공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혼란을 가져온다. 우리는 모두 바오로 사도가 왜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4] 이는 마치, 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지은 이후로 죄와 악이 인간의 마음에 들어와서 우리 스스로가 자기 방어를 하는 듯이 보인다. 여기에서 절제의 명확한 역할이 나타난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개인적인 내면을 보호하고 방향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길’이 남성과 여성의 삶에서 절제를 수행하도록 돕는 가르침들 중 하나는 “거절하는 것에 익숙해 지는 것”이다. [5] 호세마리아 성인이 그의 고해자에게 이 의미에 대해서 설명할 때 이렇게 말했다. “욕망과 감각에 따르는 것은 쉽다…” [6] 한 모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가 ‘예’라고 말할 때는 모든 것이 쉽다. 하지만 우리가 ‘아니오’라고 말해야만 할 때는 망설이기가 쉽고, 이를 표현하기 보다는 입을 다물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데에 익숙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로 인한 내면의 승리는 평화를 가져다 주고, 결과적으로 우리 각 가정에 평화가 깃들고, 이 평화는 나아가 사회와 전 세계로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7]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종종 평화의 근원이 되는 내면의 승리를 가져다 준다. 이는 우리 자아의 욕망, 무질서한 열망 등 우리 안에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들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는 우리 자신의 자유를 긍정하고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과 모든 대상에 일견 매혹적으로 보이는 ‘예’라고 대답을 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이들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어 자신을 ‘몰개인화’ 시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주위에는 자신의 환경에서 오는 욕구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느껴지는 갈망에 ‘아니오’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아니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 능력이 없는, 개성 없는 아첨꾼이거나 위선자들이다.

모든 것에 ‘예’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은 그에게 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에, 자신의 마음에 보물을 간직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8] 이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도 맞설 필요를 느낀다. 따라서 무엇인가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다른 선한 것에 헌신하는 것이고, 자신을 이 세상에 자리매김 시키는 것이고, 자신의 가치 척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확인시키는 것이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과 행동 방식인 것이다. 이는 결국, 자신의 개성을 구축하고, 자신이 진실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에 헌신하고,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알려지기 원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차분하다 (well-tempered)”라는 표현은 종종 우직하고 한결 같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절제(temperance)는 자아 통제이다.” 자아 통제는 어떤 개인이 다음과 같은 것을 인지할 때 얻어진다. “우리 몸과 영혼이 경험하는 것 모두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본능에 따르는 것은 쉽지만, 그 길은 결국 슬픔과 절망에 의한 고립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9] 이런 사람들은 기만적인 행복을 찾거나 순간의 감각과 같이 결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외적인 자극에 의존하게 된다. 무절제한 사람은 이런 저런 대상을 쫓아다니다가 끝없는 방황의 덫에 걸리게 되어 자아로부터 헤어날 수 없이 멀어지게 되고 결코 평화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불만족해있어서, 마치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살고, 언제나 새로운 감각을 찾으러 다녀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악습들은 무절제라기 보다는 죄악의 노예이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자신을 방탕에 내맡겼다. [10] 무절제한 사람은 항상 새로운 감각과 쾌락을 찾아 덤벼대고 자아 통제를 잃은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절제의 열매는 평온하고 차분하다. 절제는 열망과 욕구를 숨죽이거나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한 개인이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되도록 한다. “질서의 평온한 상태” [11] 인 평화는 오직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고 자신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에서만 발견된다.

절제와 온건함 (Temperance and moderation)

어떻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절제의 미덕을 가르칠 수 있을까? 호세마리아 성인은 종종 이 질문을 던졌고 두 가지 요점-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키면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부모가 자녀를 다음과 같이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절제력 있게 살고 스파르타 방식처럼 기독교적 삶을 사는 것. 이는 어렵지만 당신은 반드시 그들에게 금욕을 가르칠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12]

첫번째로, 부모들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적 금욕 생활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금욕은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돕기 때문에, 교육 받은 사람들은 그 효과를 안다. 만일 부모들이 자신들의 절제 있는 생활을 통해 영혼의 기쁨과 평화를 보여줄 수 있다면, 아이들은 그들을 따라 할 유인을 갖는다. 이 미덕을 전달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방법은 가정에서, 특히 아이들이 어린 가정에서 이뤄진다. 부모가 변덕스럽게 보일 수 있는 농담을 관두거나, 자신의 휴식시간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보일 때 (예를 들어서 아이들의 숙제를 돕는다거나, 막내를 목욕시키고 먹여주거나,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 아이들은 이러한 행동들의 의미를 파악하고 자신들이 가정에서 갖는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둘째로, 절제의 미덕을 바람직한 생활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부모가 절제 있게 생활할 때 이러한 미덕을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더 쉽다. 하지만 가끔은 부모가 아이들의 정당한 자유를 방해하거나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 방식을 “강요”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억누르는 것이 과연 효과적일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아이들의 충동을 저지하더라도 그 갈망이 그대로 있거나 오히려 강해지지 않을까? 특히 아이들의 친구들은 이미 갖고 있는 경우라면? 아이들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차별 받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멀어지거나 반항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적이라면, 이런 반론들 중 그 무엇도 설득력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절제 있게 산다면, 절제는 좋은 것이며 아이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을 비이성적으로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인생을 준비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호세마리아 성인이 역설했듯이, 금욕적인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절제는 원죄가 인간의 본성에 들여놓은 혼돈 상태에 질서를 만드는 필수적인 미덕이다.

절제는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습득해야 하는 미덕이다. 따라서 우리는 왜 절제 있게 살아야 하고, 각 상황에서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일시적 기분이나 아이들의 갈망 (자연적이긴 하지만 강한 성욕의 초기단계에 의해 오염된 욕구)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자유와 절제 (Freedom and temperance)

무엇보다도, 아이를 키울 때 동시에 떠오르는 질문은 절제와 자유이다. 자유는 한 인간의 존재를 통괄하는 것이고 모든 교육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영역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교육은 각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올바로 형성해 나가기 위한 결정을 자유롭게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과정은 부모가 자녀의 의지를 대신하고 매 순간을 통제하거나, 아이의 인격이나 스스로의 판단이 길러질 여지를 남겨두지 않을 정도로 과도한 권위를 휘두르는 보호적인 태도에 의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방식들은 한 개인의 “대체물”을 만들거나 개성 없는 인간을 만들 뿐이다.

올바른 접근 방법은 아이들이 자기 나이에 맞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도록 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낳는 결과를 보여주면서 선택하는 것을 배우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동시에 자녀들은 올바로 선택하기 위해, 또는 잘못된 결정을 바로 잡을 수 있기 위해서, 부모와 자신의 교육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지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호세마리아 성인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의 부모님은 그가 사달라는 것마다 모두 사주지 않았고, 그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줄 때는 다른 먹을 것을 준비하지 않았다. 결국 어느 날 이 어린 소년은 그가 싫어하는 음식을 벽에 던져버렸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자신이 한 행동이 무엇을 초래했는지 볼 수 있도록 몇 달간 벽에 음식 자국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13]

호세마리아 성인 부모님의 태도는 우리가 잠깐의 기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어떻게 아이의 자유와 부모로서의 엄격함을 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각 상황에서의 대처 방식은 다를 것이다. 아이를 기르는데 있어서는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각 자녀에게 가장 잘 적용되는 방식을 찾는 것이고, 어떤 가치가 소중하게 여겨져야 하는 것이고 어떤 가치가 해로운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유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고, 아이가 비합리적이거나 임의적이라고 느낄 수 있더라도 누군가의 판단을 항상 강요하는 것보다는 가끔 실수하는 것은 괜찮다.

호세마리아 성인의 이 작은 일화는 절제를 교육시키는 중요 분야 중 하나인 식사 시간의 예를 보여준다. 식사 예절에 관한 모든 교육은 자녀들이 절제를 배울 수 있도록 돕는다.

물론 인생 각 단계의 특별한 상황마다 다른 방식의 교육이 필요하다. 가령 청소년기에는 친구를 사귀는 데 특히 더 신중해야 하고,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더 자세히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식사시간의 절제는 유아기부터 쉽게 가르칠 수 있고, 이로 인해 길러진 인내심과 자아 통제는 아이가 청소년기에 절제와 관련해 어려움을 겪을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한 반찬을 준비한 다음 아이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음식부터 먹게 한다든지, 음식을 남기지 않게 한다든지, 식기류의 올바른 사용을 가르친다든지, 다른 사람들이 먹을 준비가 된 다음에 먹기 시작하도록 한다든지 등의 예는 아이가 의지를 기르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특히 유아기 때 부모가 보여주는 가정 내에서의 절제에 관한 환경은 아이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습득된다.

예를 들어 부모가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고 다른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거나, 식사시간 이외에 간식을 먹지 않는다거나, 무척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가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먹기까지 기다리는 행동을 보이면, 아이들은 이러한 행동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나중에 적절한 기회가 오면 아이들에게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아듣기 쉽게 말해줄 수 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기 위해서라든지, 다른 가족들에게 애정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든지, 또는 예수님께 작은 희생을 바치기 위해서라든지 등과 같이,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곧잘 이해하는 이유들 말이다.

J.M. Martin and J. de la Vega